마태복음 1장 18-25절 진리로

설교 본문: 마태복음 1:18-25
설교제목 : 진리로 오신 예수님
설교자: 안영혁 목사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하고 조용히 이혼하려 하였더라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결혼하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22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여호와께서 선지자들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23 a)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24 요셉은 잠에서 깨어 주의 천사가 분부한 대로 행하여 아내를 맞이하였다.

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진리로 오신 주님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자신을 나타내셨다는 뜻입니다.

이 사건의 감동을 잠언의 한 마디로 전하고 싶습니다.

잠언 29장 18절은 비전이 없으면 사람이 제멋대로 행동한다고 ​​말합니다.

깊이 있는 진실은 종말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진리가 없으면 사람들은 무모하게 행동하고 길을 모릅니다.

예수님은 그렇습니다.

그가 없었다면 사람들은 진심으로 사는 법을 몰랐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무자비한 백성에게 길을 내셨습니다.

수원지방검찰청에서 근무하던 정재윤(31) 검사가 과로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나이는 돌아가신 예수의 나이보다 어리다.

수원지방검찰청 초임 검사였다.

그는 노무현 정부 이후 제기된 사행성 연예물 불법 거래와 해사설화를 막기 위해 화성연합을 영입했다고 말했다.

법원경매를 방해한 부산칠성파와 대구동성로파도 구속됐다.

나라의 고위층과 권력자들의 부조리함을 자주 보게 되는데,
이런 검사를 받기 전에는 정말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는 결단력과 부지런함이 없었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일을 해냈습니다.

검사 첫 해에는 국가를 위해 헌신했다.

나는 대전역에 서서 조폭들이 싸우는 것을 보았다.

잔인했습니다.

나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지만 정말 대처하기 어렵다는 것을 온 몸으로 느꼈다.

그래도 이 젊은 검사들이 이 조폭들을 체포했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죽은 정재윤 검사에게서 진심이 보인다.

예수님의 탄생에서 보이는 것은 정성입니다.

예수님 없이는 정말 안 되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오셔야 하는데 오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진리로 오신 것입니다.

진실은 결국 매우 절실합니다.

진실은 못을 박으려면 망치가 필요한 것처럼 무엇보다도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 명백함과 함께 위험에 처한 인간의 운명입니다.

인간의 운명이 달려 있는 명백한 사건은 그리스도의 탄생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진리 안에서 우리에게 오신 방법입니다.

오늘 본문은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1. 예수의 탄생

성경 연구의 기본 구조는 관찰 해석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관찰하기로 선택하면서 본문을 이해하는 첫 단계로,
실제 사건의 핵심은 18절과 25절에 있습니다.

본문의 처음이자 마지막 부분입니다.

본문의 첫 구절은 그녀가 잉태되었다고 말하고 마지막 구절은 그녀가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이 사실에 대한 많은 수사를 제외하고 이 사실 자체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낳으셨고 참으로 탄생하셨습니다.

잉태에 대해 말하자면,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셨습니다.

창세기 1장 2절에서 성령은 본래 아무것도 없는 세상에 창조의 영으로 역사하셨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물 위에 운행하시니라”
혼돈만이 흩어지지만 직접적으로 색과 생명을 주신 분은 원래 성령님이셨습니다.

역사가 흐려지고 구원이 다시 필요하게 되자 성령께서 다시 움직이셨습니다.

오늘 본문입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을 마리아의 몸에 잉태시키셨습니다.

태초에 혼돈 너머에 세상이 창조되었듯이 성령님은 혼란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다시 시작하셨습니다.

즉, 주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받을 것은 성령을 우리 가운데 초청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혼돈에서 세상을 해방하셨습니다.

그는 또한 구속이 파괴되고 있는 세상에서 구속의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우리 삶에 혼란과 죄의 혼란이 있을 때 성령께서 그들을 치유하셔야 합니다.

성령님은 치유하셔야 하며 또한 치유하실 수 있습니다.

날마다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사는 예본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숨을 내쉴 때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감히 예수님을 본받지 못한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번역하겠습니다.

여러분, 성령을 받으십시오.
여러분의 삶과 미래와 내면세계에 성령님이 역사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전 생애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잉태 때부터 성령 충만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25절에서 드디어 예수님이 탄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의 감격을 전하는 것은 마태복음이 아니라 누가복음이다.

누가복음 2장 25절에서 시므온은 하나님이 이제 나를 자유케 하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누가복음 2장 38절에서 안나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을 찬양했습니다.

예수님은 조부모가 된 사람들이 평생을 기다려온 아기였습니다.

지친 이스라엘의 상징이 될 수 있습니다.

지친 모습을 그리스도 앞에 내려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우리의 지친 삶, 평화가 없는 세상, 그런 건 있어도
오늘 본문은 구속자 예수님이 분명히 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가지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예수의 탄생은 과학자들이 항상 증명하려고 노력하는 역사성보다 더 강하다.

사람들은 그것을 원했고 하나님은 그것을 이루셨습니다.

역사적 증거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구속자 예수의 탄생을 뜻하시고 성취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예수가 태어났다.

2. 임마누엘의 예언

냉정하게 물어보자.
예수님은 왜 오셨습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임마누엘의 실현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임마누엘이라는 단어는 성경 전체에서 단 세 번 나옵니다.

이것은 마태복음에서 예수가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으로 직접적으로 불린 유일한 구절입니다.

이사야서에 두 번 나오는 임마누엘은 예언이었습니다.

실제로 오신 예수님에게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이 적용된 곳은 이곳뿐이다.

그러나 의미상 매우 가까운 것도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단어는 시작과 끝을 하나로 모으는 수미 상관 방식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처음 나실 때 사람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친히 나타내셨습니다.

모든 일을 마치고 부활하신 후에
“나는 항상 당신과 함께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의 뜻이 확고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마태의 메시지 전체는 그 의지를 감싸고 있으며 그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의 뜻은 처음부터 끝까지 견고합니다.

제가 선교사였을 때 다니엘 학교라는 장애인 공동체에 가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나는 그 때 말했다.

정말 한 단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가장 쉬운 말은 무엇일까요?
현재 성령님의 인도하심 아래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살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 나는 그랬다.

선택의 여지가 더 있었다면 다음에는 예수님이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신다고 말해야 했는데 잘하지 못했습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사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를 다시 데리러 천국에서 우리와 함께 살게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나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삽니다.

친구 여러분, 공동체 생활은 우리가 바라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삶을 잘 정리하지 못한다면,
주님께서 친히 오셔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리하셨습니다.

동행하는 삶입니다.

우리 교회를 돌아볼 때입니다.

테스트나 딜인데 잘 안 될 때가 많아요.
10대들은 공부도 잘 못하고 유도나 애니메이션도 잘 못한다.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우여곡절이 많았던 어른들이 있습니다.

누구나 어느 정도는 불안하고, 부족하고, 어느 정도는 다운되어 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모든 조건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말씀하십니다.

“임마누엘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동행하시리라” (아멘)

진정한 사랑으로 아내나 남편의 손을 잡아본 적이 있습니까?
그 손이 얼마나 따뜻했고 얼마나 친절했는지 기억하십니까?
그래서 주님이 우리 손을 잡고 가십니다.
그것이 임마누엘의 은혜입니다.

항상 검색하지 마세요
우리가 누군가의 손을 다시 잡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예배 선생님께 토요예배를 바꿔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기타와 피아노를 배우고 있는데 처음 시작했을 때 함께 노래를 부를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예’라고 말했다.

1월에는 토요일에도 예배모임이 있을 것 같습니다.

모두 오세요
하지만 우리는 착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런 찬양을 부를 수 있다면 훗날 어딘가에 가서 다른 사람들의 동반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동행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그렇게 살을 만지는 교제를 실천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3. 예수로 나심 – 죄에서 구원하실 자

오늘 본문은 조금 더 깊이 들어가서 예수님의 궁극적인 의미를 가르쳐 줍니다.

드물게 언급되는 임마누엘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자주 언급되는 실명이 있습니다.

그 이름은 예수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헬라식 이름이고 히브리식 이름은 예슈아입니다.

조금만 더 쓰면 여호수아가 됩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많은 것들로부터 보호받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이 탈출하고 싶은 고통이 많이 있습니다.

문명의 발달로 왜 아픈지 모르는 통증클리닉이 많다.

몸과 마찬가지로 마음도 알 수 없는 많은 원인으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스트레스는 도시인들의 사회적 고통의 가장 광범위한 표현이다.

영원이라는 개념은 있지만 영원을 체험하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그러나 그 고통을 이겨내려는 사람들에게 최후의 장벽은 언제나 죄였습니다.

죄에서 건짐을 받아야 비로소 건짐을 받을 수 있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참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 로마서 1장 28절을 다시 봅시다.

성경은 죄에 대해 매우 구체적입니다.

예수님도 우리를 구원하시는데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이 분명합니다.

바벨론, 그 다음에는 헬라, 그 다음에는 로마, 또 다시 수리아의 압제를 받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죄로부터의 구원을 분개하게 말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에서 구원이 오는 목표였습니다.

로마서 1장은 죄에 대해 말합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간직하기 싫어
이것은 인간에게 죄이자 고통입니다.

불의, 더러움, 탐욕, 악독, 시기, 살인, 분쟁, 속임, 악독, 수군수군하는 것, 비방,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 능욕, 교만, 자랑, 꾀, 악행, 부모를 거역하는 것, 어리석음, 약속을 어김, 무자비한 일, 무자비한 것 것들.

그게 다 죄야
이러한 것들이 우리를 방해하고 놓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교회는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는 기관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죄에 대한 교회의 관점의 원칙은 용서입니다.

예수께서 죄를 다루신 독특한 방법은 마태 복음 18:21, 22에 나옵니다.

제자들이 “형제 죄를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7번이면 참을만하지 않을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십시오.
이 말은 끝없이 용서하라는 뜻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단어에는 죄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죄는 일곱 번 일어났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일어나고 일어나고 또 일어나고 또 일어나고 끝없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선 예수님은 죄를 용서하는 길은 오직 하나라는 확고한 입장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끝없이 용서하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 땅의 길을 평탄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리라는 말씀은 마태복음 18장의 해석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성전에 들어가 땅을 밟는 것은 미신을 믿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하면 세상에서 죄를 제거하는 대신 죄를 쌓을 것입니다.

박사님에 대해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장기려와 대화.
최신 통계를 보려면
가난한 사람들은 암으로 사망할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가난한 사람과 부자 사이에 암 발병률에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부자들은 조기 발견 때문에 생존할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도 발병률이 비슷하다는 사실이 안심이 됩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아프기 때문에 암에 더 많이 걸리는 것은 아닌지 궁금했습니다.

설마.
생각해보면 암은 경제적으로 매우 동등한 질병입니다.

그러나 대우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이에 크게 다르다고 한다.

이 곳을 떠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박사 제가 존경하는 장기려 선생님은 처음으로 건강보험에 도전하셨습니다.

성인과 같은 사람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단계였습니다.

삶의 모든 곳에서 구원의 자리를 얻게 하소서.
좋은 일에도 문제와 실수가 가득한 세상에서
주님의 구원의 중요성을 알고 인식하여 항상 구원을 누리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입니다.

4. 정말 잘해달라는 이벤트다

이제 마지막으로 한 가지 생각을 더하고 싶습니다.

성경은 참으로 순결하고 정직하여 오직 화평만을 추구하며,
세상의 악이 얼마나 독하고 사람이 얼마나 똑똑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성경을 지키며 사는 삶은 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그리고 가끔 이렇게 살다가 돈 안잃어?
이 미묘한 세상에서 나는 차라리 천박한 괴짜가 되지 않을까?
요즘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누구나 생각하는 그 사람이 얼마나 추악하고 추악한지 알 수 있다.

순진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세상을 모르고 온실 속에 사는 것 같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내가 순수하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어떻게 보면 이건 좀 억지스럽지만
어떤 점에서는 그가 세상을 모른다는 것이 냉소적이기도 하다.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인생이란 그런 것 같아요.
정말 정말 좋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정말, 정말 예수님과 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춘원은 이광수에게 박사님을 보고 성인이 아니면 바보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장기려 봤어?
박사부터 어렵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후처럼 장기려를 성인으로 꿈꾸는 것.
여러분, 그런 본보기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운입니까?
나도 예수님과 같은 인간입니다.

나는 정말 예수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정말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은 가질 수 없나요?

대림절 넷째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번주 마지막 다짐도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은 정말 좋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듣고 숨이 멎을 정도로 좋은 사람이 아닐까요?
그런 생각이 우리 가운데 살아 있기를 바랍니다.

나치 치하에서 의로운 삶을 살았던 본회퍼는
그는 내가 죄를 지었다면 실제로 내 손을 잘라버릴 수 있을 정도로 순수하게 살라고 조언했습니다.

Pannenberg라는 사람은 그의 책 The Fundamentals of Christian Ethics에서 썼습니다.

현대는 신도 윤리도 사람의 삶을 규정하는 원칙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의 원칙을 어기지 않도록
진정으로 잘 살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따른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숨이 멎을 듯한 방식으로 제시되어야 합니다.

그것만이 기독교에 새 생명을 불어넣을 것입니다.

이번주는 크리스마스 기념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그런 결심을 하되 굳건히 서시기 바랍니다.

우선, 당신은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윤리적으로 행동하십시오.
윤리란 원래 좋은 습관을 말하며,
이러한 윤리적 습관을 넘어
그리스도 예수께서 당신 안에 숨이 막힐 정도로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바랍니다(아멘).